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이 9월26일 쓴 칼럼 박근혜의 죽어서 사는 길을 읽고 답답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한국의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심각한 오류를 깨닫지도 못한 채 아직도 오만과 지적 허영에 취해 있는 것이다. 그나마 나름 연륜 있다는 김대중 주필마저 이 모양이니 한국 언론이 각성할 날은 아직도 요원할 듯 싶다.

김대중 주필은 “그(박근혜)는 아직 자신이 무고하고 아직도 살아날 수 있으며 아직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썼다. 그런데 박근혜가 기소된 혐의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사실 아닌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모든 증거가 들어있다던 태블릿PC 3대가 허위로 드러났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박영수 특검팀이 박근혜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곧 무고하다는 것 아닐까? 무고함이 드러났다면 박근혜는 살아나야 한다.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게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이다. 억울한 죄를 덮어쓰고 명예가 땅에 떨어진 전직 대통령에게 이제 와서 보수가 무너진 책임을 지라는 억지는 쓰지 않기 바란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짜로 독재자였다면 국가권력을 앞세워 JTBC를 비롯한 좌파 언론에 개입하여 태블릿PC 조작을 밝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사회의 원칙을 위해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 이것만 해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데 오히려 무능의 아이콘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보수 진영에서. 좌파 언론들이 ‘이번에는 태블릿PC에서 이것이 발견되었다!’며 매일 밤 군중에게 물어뜯을 먹잇감을 공급하고 있었을 때 보수 언론인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보수는 박근혜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김대중 주필 당신처럼 불의에 맞서지 못한 비겁한 언론인들 때문에 무너진 것이었다고 말하면 과도한 말일까?

이념에는 중도가 있으나 참과 거짓에는 중도가 없다. 박근혜 재판은 우파와 좌파의 대결이 아니라 참이냐 거짓이냐의 문제이다. 김대중 주필은 박근혜 석방을 요구하는 세력을 집단 인지부조화에 시달리는 일종의 광신도들로 보는 것 같다. 언론인들은 ‘민초’를 자신들의 얄팍한 문장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마법의 단어로서 자주 사용해왔으나 정작 민초들의 판단력은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박근혜 석방을 요구하는 민초들은 결코 당신들이 어루만지고 가르쳐서 ‘진실’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아니다. 만일 박근혜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 특검 말마따나 차고 넘치도록 있지 않아도, 그저 단 하나만 나왔다 하더라도 –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촛불을 들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근혜 지지자였든 아니었든, 박근혜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허위로 드러난 이상, 박근혜 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의 공정함을 믿는 모든 시민들의 타당한 요구인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이란 정권의 비리가 담긴 태블릿PC를 발견했다고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던 인간이 뻔뻔스러운 얼굴로 ‘어쩌면 태블릿PC 따위는 필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고 말하는 모습이 아니라 억울하게 기소당해 날개가 꺾이고 땅에 떨어진 명예가 다시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어도 그저 ‘박근혜니까’ 처벌 받아도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마녀사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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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의 명예가 언젠가는 회복되리라는 믿음을 한낱 망상으로 치부하는 김대중 주필에게 정론(正論)이란 대체 무엇인가? ‘정답’을 말하는 것이 정론인가? 실상은 그저 나약한 기회주의자들에 지나지 않지만 지식인이라는 자존심만은 누구보다도 강한 보수 언론인들은 문재인의 ‘촛불혁명’에 동조하는 않는 선에서 박근혜를 비난했다. 권력자를 견제하노라는 허울 좋은 자기합리화에 몸을 맡긴 언론인들은 촛불시위대가 박근혜에게 돌을 던질 때 그들 뒤에 숨어서 박근혜에게 침을 뱉였다. 만일 당신네 보수 언론인들이 조금이라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면 숱한 조작 보도를 해온 손석희가 보도하는 국정농단에 대해 의문부터 가졌을 것이다. 물증다운 물증 하나 제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관련자들의 증언만을 받아내어 사건을 재구성하는 박영수 특검의 수사에 불만부터 가졌을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괴담을 계속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극좌 언론의 폭주를 막아야겠다는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의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생각한 순간, 보수 언론들인은 비판적 사고능력을 정지시켰다. 당신들 중에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었는가? 김대중 주필은 “보수층 사람들은 문재인 정권의 안보 우왕좌왕과 좌편향 폭주가 심해질수록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동시에 원망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라고 썼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느끼지만 원망만큼은 당신을 비롯한 언론인들에게 하고 있다. 정확히 알아두길 바란다.

한동안 박근혜를 꾸짖고 나더니 김대중 주필은 이제 보수의 전략을 설교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균형감각 있는 중도파이며, 보수 재건의 선지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김대중 주필은 친절하게도 보수를 부활시킬 마법의 연설 샘플까지 써주었다. “나는 한국 정치의 참신한 변모를 위해 출발했으나 나 자신에 얽힌 트라우마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오늘날 ‘최순실 사태’의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그것이 누구의 농간이었건 모든 것은 나의 불찰이요 나의 부덕이요 나의 정치적 죄임을 깨달았다. 나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 나로 인해 영어의 몸이 된 사람, 나로 인해 정치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을 대신해 내가 그 업(業)을 안고 가겠다. 그것이 평생 배신을 인간 최악의 범죄로 여기며 살아온 내가 지지자들을 배신하지 않는 길임을 이제야 절실히 느낀다. 모든 사람 풀어주기 바란다.” 감성 충만한 김대중 주필의 호소는 간단명료하다: 누구의 농간이었든 그게 이제 와서 뭐 중요하단 말인가. 박근혜 당신이 희생하겠다 말하면 다들 감동을 받을 거 아니냐고. 그리고 감동 받은 보수는 다시 한번 뭉칠 거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진실을 내세우며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은 정작 진실을 찾아야 할 때에는 진실까지도 뭉개버리고 감동을 요구한다. 김대중 주필의 말대로라면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도, 베티 앤 워터스(Betty Anne Waters)도,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도, 그저 자신의 업을 안고 가야 했었다. 김대중 주필이 박근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살신성인’이다. 하긴 주인공의 거룩한 희생처럼 통속 드라마의 엔딩으로 써먹기 적절한 것도 없기야 하다. 그러나 정치는 통속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는 감동을 주고 방영을 종료하면 그만이지만 정치는 항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답게 살신성인을 몸소 실철하는 인간 박근혜가 주는 감동’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김대중 주필의 권고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 그 자체가 불의이기 때문이다. 미네르바 박대성에게 정부 전복을 위해 자살을 권유한 좌파와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러한 싸구려 감동으로 보수가 다시 단결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시각 자체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싸구려 감동을 마치 아편처럼 계속 공급하고 있는 문재인 세력을 보면서도 반면교사로 배우는 게 없단 말인가? 새로운 보수가 반드시 ‘친박’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보수는 감성과 각본이 아니라 이성과 정책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박근혜 탄핵으로 한국 보수는 분명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 타격에서 회복하기 위해 박근혜를 쳐내자는 주장에는 동조할 수 없다. 그 원인이 박근혜의 실정(失政) 때문이라면 몰라도 ‘최순실 스캔들’이란 결국 좌파의 정치공작에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번 다시 정치공작에 당하지 않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이끌어내기 위해 민주사회의 윤리와 원칙을 저버린 세력에 대한 응징은 한국 보수가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이다. 그 숙제에서 눈을 돌리면서 감히 보수를 일컫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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